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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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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역사관광 > 종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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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이 개태사지는 고려< 高麗 > 태조< 太祖 > 왕건< 王建 >이 후백제< 後百濟 >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부처의 위력과 하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달라는 기원문< 祈願文 >을 손수 지어 바치고, 동왕< 同王 > 23년(940)에 창건한 절의 터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영정< 影幀 >이 있어 나라에 전쟁< 戰爭 >의 기미< 機微 >가 있으면 그 영정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 太平 >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말기< 末期 >에 이르러 왜구< 倭寇 >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사세가 차츰 기운 것으로 보인다. 현 개태사 경내에는 보물 제219호인 개태사지 삼존불상< 三尊佛像 >이 봉안< 奉安 >되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원래의 절터인 동북쪽에는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石槽 >, 불대좌< 佛臺座 >, 축대 등이 남아 있다. 또 상방산< 上方山 >의 한 암자< 庵子 >에도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1구< 石造佛坐像一軀 >가 안치되었고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靑銅製 > 반자< 飯字 >는 국립부여박물관< 國立扶餘博物館 >에 소장되어 있다.

위치